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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묘] (10) 어떤 죽음들

입력 : 2019-01-30 17:15:30 수     노출 : 2019-02-01 00:00:00 금
나한거사(羅漢居士) webmaster@idomin.com

"어떻게 하면 성현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영웅호걸이 되는가? 충신과 간신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어떻게 하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까?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이란 무엇인가?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역경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기상이란 무엇인가? 오류를 바로잡고 누명을 벗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당당하고 격한 명제들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고 역사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명제들이 자신의 삶에 출현하게 될 확률이란 얼마나 되고 또 얼마나 진실하단 말인가?"

문화사학자 위치우이가 탄식을 담아 한 말이다. 사서나 소설, 혹은 영화를 수놓는 거대한 드라마는 늘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런 드라마에 빠질 때면 대부분 자신이 소시민이라는 걸 자각하기 쉽지 않다. 당당하고 격한 명제들이 온몸을 휘감아 돌기 때문에 한동안 정신줄을 놓곤 한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자신을 둘러싼 시공간이 '초라한 일상'에 불과함을 절감한다. 위치우이의 물음처럼 당당하고 격한 명제들이 일반인의 삶에 출현하게 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제로에 가깝거나 아예 없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성싶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신의 바람과 몽상이나, 현실에서 찾기 힘든 덕목을 실현시켜줄 투사체를 찾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당당하고 격한 명제들은 이 과정을 통해 무게감과 생동감을 갖게 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들이 열광한 '죽음'을 더듬어보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흥행요소만 있다면 이런 죽음은 곧잘 전설이 된다. 그리고 전설은 세월을 거치면서 스스로 그 이끼를 더하기에, 종래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성역으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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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일왕이 죽자 그를 따라 부인과 함께 자결한 노기 마레스케.

1912년 7월 30일 일본 근대화를 이끌었던 메이지 일왕이 죽었다. 러일전쟁 참전군인이자 왕족과 귀족을 위한 가쿠슈인(學習院·학습원) 원장이었던 노기 마레스케는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자택 거실에서 부인과 함께 자결했다.

이른바 순사(殉死·죽은 이를 따라 죽는 것)다. <무사도>를 쓴 니토베 이나조는 이 소식을 듣고 열광했다. 그는 "무사가 지킬 충성의 모범으로 국민과 군대에게 큰 교훈을 주는 행동"이라고 극찬했다. 어떤 승려는 노기의 장례식에 "만세! 만세! 만세!"라고 쓴 축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대체적인 여론은 싸늘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며 죽는 것만을 충의인 줄 아는 행동이자 국제적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아사히신문 또한 "아무런 교훈도 주지 못하는 해로운 행위"라고 썼다.

'명육사'(明六社·메이지 시대 계몽을 장려했던 지식인 결사)의 최후 생존자이자 저명한 철학자였던 가토 히로유키는 "옛날 도덕으로 보자면 장군의 행위는 칭찬받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라며 "이 충절의 화신은 어째서 새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려 하지 않았을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군부(軍部)는 다른 장교들이 노기의 순사를 본받을까 두려워 죽음에 이른 동기를 감추고, 자살을 정신 착란 탓으로 돌렸다.

그런데 순사 이틀 후 신문 논조가 돌변하면서 노기는 일왕에 대한 충성의 화신이 되어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전설적 영웅이 되었다. 이른바 군신(軍神)으로 등극한 것이다.

사실 군부가 당황한 것처럼 지배계급 또한 처음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결에 '우스운 짓'이라며 냉소를 보냈다. 하지만 자결 소식에 민중들이 뜨겁게 반응하자 노기가 '메이지 일왕시대를 선양할' 대표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리하여 노기는 무인이 지녀야 할 충절과 왕실에 대한 헌신을 완벽하게 체현한 사람으로 자리 잡게 된다. 민간에서는 이후 노기 신사(神社)가 줄줄이 세워졌다. 서울 남산 자락인 사회복지시설 남산원에도 일제 때 존재했던 노기 신사 흔적이 있을 정도다.

노기는 군신이 되는데 필요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지니고 있었다. 첫째 러일전쟁 때 아들 둘을 잃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다. 둘째 메이지 일왕의 신임을 받아 가쿠슈인 원장으로 일하면서 귀족들의 존경을 받았다. 셋째 러일전쟁 때 맞섰던 러시아군 사령관을 돕는 무인상(武人像)을 보여주었다. 넷째 종전 후 전사자 가족에 대한 위문을 끊임없이 실천하고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일왕을 따라 자결하다니! 자결은 이 모든 흥행요소를 '스토리텔링'으로 승화시키는 발화점이 됐다.

노기는 군인으로서는 박한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그가 사령관으로 전투를 지휘했던 러일전쟁 뤼순공방전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만 4000여 명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57,780명의 사상자를 냈다. 세간에서는 당시 노기를 오로지 돌격만을 외치는 무모한 군인이라고 비난했다. 메이지 일왕 또한 당시 엄청난 사상자 소식을 듣고 "젊은이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면 되나"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물론 러시아 함대가 동해로 오고 있었기에 극동 러시아 해군기지인 뤼순을 빨리 점령해야 했고, 러시아 요새가 중무장 상태여서 공략하기 어려웠다는 점은 충분히 감안할 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러시아 방어력을 경시한 채 정신력에 의존한 돌격만으로 승패를 결정지으려 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군신으로 추앙받는 사람이 지닌 이력치고는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다. 노기는 이런 점에서 중국에서 군신으로 대접받는 관우(關羽)와 많이 닮았다. 중국 사가 레이 황은 "적정(敵情·적군의 상황)에 대한 판단이 겉치레 수준이어서 마지막에 관우의 군대는 싸우지도 못한 채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이런 기록은 표준이 되는 문헌에 나오는 것인데 중국 민간에서 여전히 관우를 싸움신으로 받들고, 비밀결사들이 그를 맹주로 삼아 제사를 지내는 건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관우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고, 노기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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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 으뜸 공신인 사이고 다카모리.

사이고 다카모리는 노기보다 앞선 메이지 원훈(元勳·으뜸 공신)이다. 1877년 신정부(新政府)에 대항해 일으킨 서남전쟁에서 패퇴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가고시마 시내 언덕에서 자결한다. 그가 이끌었던 반란군과 함께 마지막 저항을 하던 중 치명상을 입자, 충직한 부관이 그의 목을 치는 것으로 생을 끝낸다.

메이지 유신을 성사시킨 일등 공신인 그는 외견상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불운아로 보인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야마토다마시(大和魂·일본 정신)를 완성시킨 '불멸의 위인'으로 꼽힌다.

이력 면에서 사이고는 노기와 비할 바가 아니다. 일단 무인으로 메이지 유신을 완성한 점, 그리고 최고 권력자 지위에 올랐지만 다른 각료들과 의견 충돌을 빚자 과감히 벼슬을 내던지고 낙향한 점, 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외치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손수 모범을 보였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받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사이고는 어떤 정치적 태도를 지녔길래 이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을까? 그는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일왕 친정국가를 세우는 것에만 몰두한 인물로, 유신 이후에도 사무라이가 국가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도개혁 과정에서 사무라이가 몰락하자 이를 부흥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정한론(征韓論·조선정벌)이란 시대착오적 카드를 꺼내든다. 이는 정치적 외교적 식견이 같은 유신 원훈인 오쿠보 도시미치에 비해 한창 못 미침을 잘 보여주는 증거로 남아 있다.

사이고는 논란 끝에 정한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한 후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의 추대를 받아 "천황을 둘러싼 간신들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그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그가 지휘한 4만 명의 반란군 중 최후에 살아남은 이는 2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로써 사무라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사이고 또한 대세(大勢)와 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크게 보면 노기나 관우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흥행요소가 있었다. 사이고를 평가하는 말로 가장 유명한 것은 "과묵하고 사욕이 없으며, 지성을 다하며 온정이 많은 사람"이다. 정치적 식견은 오쿠보에 못 미쳤으나 신생국가와 사무라이 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했다는 점, 그러다 결국 자신을 따르는 사무라이들을 내치지 못하고 그들과 함께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보여준 영웅적 행보와 함께 민중들에게 깊이 그를 각인시켰다.

자결은 이런 삶을 불꽃으로 승화한 촉매제가 됐다. 그의 삶은 "양이(洋夷·서양 오랑캐)를 대적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근대화에 나섰지만, 뜻이 관철되지 않자 죽음으로써 일본정신을 지킨 사람"으로 요약된다. 때문에 민중들 사이에서는 1890년대까지도 그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고 때를 기다리며 은거 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죽음으로 유명한 인물 중에 중국 위진(魏晉)시대 사람 하후현이 있다. 죽음에 임하는 위진시대 사대부의 풍골(風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어림(御林)>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후현이 기둥에 기대어 글을 쓰고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오면서 벼락이 쳐 기둥이 부서졌다. 빈객과 좌우 사람들이 혼비백산했지만 하후현은 옷이 그을렸음에도 안색도 바꾸지 않은 채 그대로 글씨를 썼다."

그가 지녔던 담량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그런가 하면 젊은 시절 하후현은 황문시랑(黃門侍·황제를 모시던 벼슬)으로 근무할 때 대궐에서 황후의 아우 모증과 같이 앉았는데 이를 몹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모증은 당시 황제인 명제(明帝)가 지극히 사랑하던 모황후의 동생으로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권세가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들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던 그를 하후현은 비루하다고 여겼다. 누이 잘 만난 덕분에 벼락출세한 '졸부' 정도로 여겼다. 그래서 모증과 한자리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한 것이다.

이 일로 하후현은 명제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황문시랑이란 중책에서 낮은 벼슬로 좌천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은 하후현이 부귀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품격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상당한 명망을 지니고 있던 하후현은 40대 중반에 정변에 연루돼 사형을 당한다. 모반죄에 얽혀 죽음을 앞둔 그에게 취조관인 종육이 사실을 고할 것을 요구하자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 경이 내 대신 공사(供辭·죄인이 죄를 진술한 글)를 쓰면 될 것 아니오?"

하후현과 친분이 깊던 종육은 끝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대신해 공사를 썼다. 그런 후 눈물을 흘리며 하후현에게 공사를 보여주자 그는 단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동시(東市·처형장)로 끌려나갈 때였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삼국지 위지(魏志)>에는 "하후현은 도량이 크고 세상을 구하려는 뜻을 품었던 인물이다. 동시에서 참형을 당하면서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여섯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사서(史書)나 야사(野史)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바는 하후현이 품위 있는 사대부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하후현은 조상 일당이 정권을 잡아 법도를 어기고 분탕질을 치는 동안 그들과 어울리며 별다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상이 패망한 뒤 벌어진 궁중 쿠데타에 연루돼 죽음을 맞는다.

"하후현은 엄격하고 도량이 있어 세간에 이름이 알려졌다. 조정의 안팎과 연결되어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했으나 일찍이 그가 조상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훌륭한 인재를 불러 받아들였다는 일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본다면 어찌 비운의 최후를 면할 수 있었겠는가?" <위지>에 등장하는 냉혹한 평가다.

정치를 담당하는 고관을 역임하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지녔던 지행(知行)이 미숙했거나, 진영논리에만 충실했던 게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위지>는 바로 이 부분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기나 사이고처럼 하후현 또한 대중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흥행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자태가 빼어났다는 점, 성격이 중후하고 도량이 컸다는 점, 그리고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지녔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눈 한 번 꿈쩍하지 않고 사형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만개한다. 위진시대 사대부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하후현을 꼽았다. 그래서 수많은 일화를 첨가한 이야기를 널리 유포했다. 이같은 미화 작업은 죽음 앞에 당당했던 그의 처신과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후대에 전설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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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직후 찍힌 비스마르크의 사망 사진.

독일을 통일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1898년 7월 30일 함부르크 동쪽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산림감시원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사진사 빌리 빌케와 막스 프리스터는 자택에 몰래 들어와 시신 머리를 방석으로 받쳐놓고 몇 장의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에 담긴 위대한 재상은 놀랄 만큼 초라한 몰골이었다. 아니 시신이라면 다 그랬을 터다. 그러나 위대한 재상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독일제국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족들이 소송을 낸 끝에 사진 원판은 압류되고, 두 사진사는 징역형을 받았다. 그런 후 비스마르크 사망 사진은 화려하게 연출된 사진으로 바뀌었다.

원판 사진은 50년 후인 1952년에 공개됐다. 이 일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말이 아닐까? "위인(?)은 삶도 그렇지만 죽음도 남다르다. 그들이 맞는 죽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대중들이 '불멸의 죽음'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도널드 킨 지음/김유동 옮김, <메이지라는 시대>, 서커스

♣ 위치우이 지음/유소영 심규호 옮김, <천년의 정원>, 미래 M&B

♣ 구주모 지음, <수필 삼국지>, 채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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