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지붕 아래 하중 나누는 과학
여러 겹 쌓여 스프링 역할하는 기둥머리 '공포'
처마 받쳐 들이치는 빗물 막도록 도와주기도

우리는 지금까지 튼튼하고 효율적인 목조건물을 만들기 위해 평면이 직사각형인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다음 지붕을 올렸다. 직사각형 평면에 가장 효율적인 지붕은 맞배지붕이었지만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 끝에 팔작지붕이 등장했다.

오늘은 기둥과 지붕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자.

▲ 아테네 에렉테움(Erechtheum) 신전 주두. 대략 기원전 421년에서 407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기둥 위 소용돌이형 장식을 가진 이오니아식 주두이다. 주두 위 수직으로 갈라진 선은 들보 두 개를 겹치면서 생기는 홈이다. /위키피디아
◇공포의 발생

서양의 벽돌 혹은 석조 건축물은 기둥과 벽이 다 하중을 받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건물 크기에 제약을 덜 받았다. 또 습기에 의한 부식의 우려도 없었다. 그래서 벽돌식 건물은 처마도 필요 없고 복잡한 지붕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동양 목조건축은 달랐다. 나무를 짜 맞추다 보니 지붕을 무겁게 만들어서 안정적으로 건물이 서 있도록 했다. 목조건물의 기둥은 벽체의 도움도 없이 아주 무거운 지붕을 홀로 이고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또 이 기둥은 빗물과 습기에 쉽게 썩어갈 수밖에 없어 특별한 보호장치가 필요했다. 들이치는 빗물을 조금이라도 더 막기 위해 처마를 만들면서 지붕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기둥이 받쳐야할 무게는 더 늘어났다. 물론 기둥 위에 간단한 지붕만 놓인 건물도 있었다. 초가삼간이 그런 경우다.

문제는 건물을 크게 만들어야 하는 순간에 발생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이 공포(拱包)였다. 공(拱)은 두 손으로 받든다는 말이다. 포(包)는 꾸러미를 말한다(김동욱, 2015,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공포는 지붕을 받치고 있는 꾸러미처럼 생긴 구조물이다. 그런데 단순히 받치기만 해서는 있을 이유가 없다. 안 그래도 무거운 지붕을 받치느라 힘든 기둥에 다시 무게를 더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뭔가 다른 존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자.

무거운 지붕이 있고 이 지붕은 들보가 일단 받치고 있다. 기둥은 이 들보와 지붕 전체를 지탱한다. 공포는 기둥 위에서 들보를 받친다. 기둥 하나가 받치는 들보는 두 개이다. 길고 가벼우면서 휘지 않고 튼튼하기까지 한 재료가 있다면 사각형 건물에서 기둥은 네 개면 충분하겠지만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부재는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들보의 길이는 기둥 간격을 좌우했다. 다시 말하면 기둥은 들보가 만나는 부분을 받칠 수밖에 없었다. 안정적인 건물을 만드려면 이 부분을 튼튼하게 해야만 했다.

처음 등장한 방안은 두 개의 들보 사이를 기둥보다 넓게 받치는 구조물을 하나 더 놓는 것이었다. 기둥(柱)의 머리(頭), 주두(柱頭·Capital)가 생겨난 이유이다. 이건 동·서양 건축물 모두에 나타난다. 효과는 상당했다. 주두는 들보를 더 안정적으로 받치면서 조금이나마 기둥 사이를 넓힐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면 이런 주두를 여러 개 쌓는다면 효과는 어떨까? 여러 겹으로 쌓인 주두! 이게 공포의 시작이다.

▲ 부석사 무량수전 공포(원으로 표시된 부분). 기둥 중심과 양 옆으로 가지가 뻗어나간 일두삼승식 구조물이 중첩되어 있다.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를 가지고 원형에 가까운 공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최형균

◇공포의 기능

석조건물에서는 여러 겹 주두가 확인되지 않는다. 하나로 충분했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목조건물에서는 이 방안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했고, 발전하면서 크게 두 가지 최적화 과정을 거쳤다. 먼저 최대한 무게를 줄이기 위해 속을 파냈다. 들보를 받치기 위해 양쪽 끝부분을 빼고 가운데 부분을 완전히 파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면 양쪽에서 들보가 눌러대니 가운데가 부러지기도 쉽고 좀 더 안정적으로 받치면서 하중을 분산시키도록 들보가 만나는 부분까지 받치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세 갈래 포크 같은 일두삼승식 구조물이 생겨났다. 하나의 머리(一頭)에서 세 개의 가지(三升)가 갈려 나왔다는 말이다. 이걸 여러 겹 겹치면 마치 스프링처럼 지붕의 무게를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탄생한 공포는 또 다른 장점이 있었다. 돌이나 벽돌은 일단 만들고 나면 크게 변화가 없는데 비해 나무는 잘 말린 재목을 쓰지 않으면 건물의 일부로 이용된 후에도 상당기간 줄어들거나 뒤틀린다. 기둥 위에 딱 맞춰 들보를 올렸는데 시간이 가면서 들보가 줄어들거나 기둥이 뒤틀린다면 집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공포는 어느 정도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포크같은 부재를 들보와 수직방향으로 만들어 넣으면 건물 밖으로 뻗어 나와 처마를 받치는 기능도 할 수 있었다. 위대한 목조건축의 구성물이 탄생한 순간이다.

▲ 하동 쌍계사 일주문. 바늘 하나 꽂을 틈을 찾기 어려울 만큼 촘촘하게 공포가 들어서 있다. 공포와 지붕이 차지하는 비율이 커 상대적으로 기둥이 왜소해 보일 지경이다. /최형균
◇공포로 보는 목조건축의 역사

이런 공포가 기둥 가운데(柱心) 위에 하나만 올라가 있는 건축양식을 주심포(柱心包)라 한다. 예전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나타난다.

"현존하는 목조 건물은 고려 후기의 것들이다. 이 시기에는 이전부터 유행하던 주심포 양식에다 다포 양식이 새로이 도입되었다."

고려시대 전기 후기에는 주심포 양식이 유행했었고 그 뒤에 다포라는 양식이 등장했다는 말이다. 다포는 주심포보다 포의 개수가 많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주간포(柱間包)라고도 하는데 기둥(柱)과 기둥 사이(間)에도 포가 있는 양식을 말한다. 공포가 추가되어서 생기는 무게 부담보다는 하중을 분산시키고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는 이득이 더 컸다는 말일 것이다. 다포양식은 고려 후기 원나라의 영향으로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 건물인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강릉 객사문이 모두 주심포 양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은 주심포,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부석사 무량수전을 제외하면 나머지 건물들도 모두 맞배지붕이다. 주심포에 맞배지붕이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주류였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양식인 다포계 건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불타기 전 숭례문이 다포계 건물이다. 다포식은 지금까지 말한 점 외에도 건물을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극단적인 다포건물은 공포가 4-5단으로 겹쳐 있을 정도로 크기도 클 뿐 아니라 포 사이도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예도 많다. 그리고 그 공포는 화려한 단청으로 치장되어 건물의 차별화를 꾀하기 위한 목수들의 주된 수단이 되기도 했다.

한편 고려시대 유행하던 주심포 건물은 약 16세기에 들어 익공식 건물로 그 형태를 바꿔나갔다. 익공은 일종의 간략화된 공포의 한 형식으로 주심포 건물처럼 기둥 위에만 만들었다. 공포를 이루는 부분이 날개(翼)처럼 뻗어 생겨 붙여진 이름인데 기존 공포가 하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 부분 대체하면서 검소한 조선시대 사대부의 독특한 미감을 보여주고 있는 건축양식이다. 목조 건물을 둘러볼 때 무언가 소박한 느낌을 준다면 십중팔구 익공계 건물일 것이다.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정전 등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다포계 건물이 화려한 고려의 상감청자라 한다면 익공계 건물은 조선시대 백자와 같은 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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