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경남독립운동연구소
후손 제보로 비문 해석
100년 만에 정부 서훈 추진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1919년 하동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후 행적을 알 수 없었던 하동 출신 독립운동가 죽헌 이병홍(1896∼1919·양보면 박달리) 지사의 행적을 100여 년 만에 무덤 묘비에서 확인함에 따라 정부 서훈을 추진하기로 했다.

비문을 분석한 재야사학자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이 비는 1920년 독립운동가 김홍권(1892∼1937·건국훈장·양보면) 선생이 비문을 짓고 합천이씨 종중과 함께 세운 것"이라고 밝혔다.

이병홍 지사의 묘비 발굴은 지난해 3월부터 하동군과 경남독립운동연구소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군내 미발굴·미포상 독립운동가 찾기 전수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양보면에 사는 이현철(56·양보합동양조장 대표) 씨의 제보로 하동군 진교면 고이리 고외마을 인근에서 묘소를 찾아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병홍 지사임을 확인했다.

▲ 하동군 진교면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병홍 지사의 무덤과 묘비. /하동군

정재상 소장은 "이 지사가 1919년 음력 윤 7월에 세상을 떠나자 벗이자 동지였던 김홍권(당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1920년 3월 순수 한글로 비문을 짓고 세운 것으로 비에는 본관·출생·사망일자·건립연도·비문 작성자 등이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묘비의 앞면에는 '志士陜川李君炳鴻之墓(지사합천이군병홍지묘)'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한글로 '∼ 뜻을 이루지 못하고 ∼ 저버린 님이여, 너의 뼈는 썩을지라도 혼은 꺼지지 않을지니 ∼ '라는 내용과 벗 김홍권이라 적혀 있다.

그리고 양 측면에는 '庚申 三月(경신 3월 (1920))과 光武元年 丙申(광무원년 병신(1896) 八月 二十四日 生(8월 24일생) 己未 閏 七月 十三日 卒(기미(1919년) 윤 7월 13일 졸) 年 二十四(년 24)'이라 적혀 있다.

1915년 진주공립농업학교 3년 졸업한 이 지사는 1919년 3월 박치화(건국훈장), 이범호(대통령표창), 정낙영(대통령표창) 등 12명과 자신이 운영하던 하동읍의 대서소에 은밀히 모여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3월 18일 하동 장날 낭독하고 군중 150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주동자로 몰린 박치화는 일본경찰에 연행돼 진주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았으며 사무실을 독립운동 근거지로 이용한 이병홍 지사는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박치화는 항소했으나 이병홍은 항소를 포기하고 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출옥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24세였다.

그가 서명하고 남긴 하동 '대한독립선언서'는 2015년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기미독립선언서와 함께 국가지정 기록물 제12호로 등록돼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후손 이현철 씨는 "집안 어른(이병홍)께서 3·1운동을 하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부친으로부터 전해 들었으나 그동안 관심을 두지 못해 죄스럽다"며 "늦었지만 목숨 바친 선대 할아버지에 대한 정부의 온당한 평가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윤상기 군수는 "하동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애국지사 12인의 행적이 한 분 한 분 밝혀지고 있어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더욱 뜻있게 하고 있다"며 "앞으로 독립운동가를 한 분이라도 더 찾는 데 경남독립운동연구소와 함께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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