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도 주목 받는 <82년생 김지영>
사회 변화 출발점은 약자에 대한 공감

그는 이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그에게 명절연휴는 온몸이 조여오는 듯한 갑갑함으로 시작해 두통과 근육통을 지나 세상 그 누구와도 말을 섞기 싫은 우울증으로 끝나는, 지긋지긋한 투병의 시간이라는 말과 함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친정의 차례준비를 맡게 된 건 결혼 후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명절 전날 친정에서 음식 장만을 마치고 그날 저녁 시가에 가기로 한 자신의 계획이, 그는 맏며느리도 아니었고 손위 동서도 조카며느리도 여럿 있었으니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달은 건 남편에게 말을 꺼내 놓는 순간이었다. 아무 대꾸도 없이, 대체 네가 무슨 정신머리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아니 노려보는 남편의 모습에서 그는 어쩌면 이런 결말을 내다본 것 같다고 했다.

이후 명절엔 늘 부부싸움이 일어났고, 그는 독립된 한 인간이 아닌 시댁에 귀속된 며느리이기만을 강요하는 세상과 투쟁하고자 했으나 번번이 투병으로만 끝나는 사태를 견디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가 마음먹은 것을 실행으로 옮겼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별과 폭력은 슬프게도 현재진행형이다. 명절문화뿐만 아니라 교육, 직장생활, 연애 등 곳곳에 차별과 폭력이 존재한다. 이 차별과 폭력의 대상은 여성에게 한정되지 않는다. 사회의 난폭함은 사회의 모든 약자에게 향한다. 남 이야기 하듯 무덤덤하게 지난한 '투병사'를 말하는 그 앞에서 되레 듣고 있던 이들의 눈물이 터진 건 그가 내 할머니였고, 엄마였고, 친구였고, 대한민국의 기혼 여성 누구나이기 때문이었다.

수년 전 만났던 그가 다시 떠오른 건 '김지영 씨' 소식을 듣고서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도 인기란다. 지난해 말 일본어로 번역돼 출간된 지 한 달 만에 5만 부가 팔렸고 며칠 전 6쇄 6만 7000부를 찍었다. 여태껏 한국소설이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던 일본에서, 젊은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오락성 짙은 소설도 아닌, 묵직한 내용의 <82년생 김지영>이 주목을 받는 건 역시 가부장적인 문화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일 거라고 현지 문학계는 말한다.

보통의 여성조차 평범하게 나고 자라 결혼하고 육아를 하는 과정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억압과 폭력을 겪는지, 출가외인이라는 굴레와 싸우고 있다고 말하던 그이처럼 담담한 목소리로 풀어낸 이야기에 일본의 보통 여성들이 공감하고 있다. 한국 여성들이 그랬듯 일본 여성들에게도 '김지영 씨'는 자기 할머니, 엄마, 친구,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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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이 '공감'에서 시작될 것이라고 믿는다. 약자를 대변하는 '김지영 씨'가 공감을 얻을 때, '김지영'이 또다른 나의 이름임을 깨달을 때, 그래서 더 많은 '김지영' 씨가 목소리를 낼 때, 약자가 더는 약자가 아닌 세상이 그곳에서 싹틀 것이다. 나의 또다른 이름,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을 내 이름을 요즘 자꾸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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