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지나 딸 서우는 우리 곁으로 왔다
천천히 그리고 착실히 자라 날 잡아주는 삶의 무게가 됐다

어느 밤 딸에게 물었다. "서우야, 태어날 때 기분이 어땠어?" 그녀는 "엄청 좋았지. 세상이 엄청 멋지더라"라고 말한다. 달뜬 목소리다. 그런데 왜 울었냐고 되물으니, "엄마랑 떨어질 것 같아서 그럴 수밖에 없었지"라고 대답한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녀석이 놀리지 말라고 핀잔을 준다. 이어서 아빠는 그때 어디 있었느냐고 추궁한다. 나는 옆에 있었노라 이야기했다. 더 듣고 싶은지 서우가 계속 빤히 쳐다본다. 해서,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 아내와 딸 서우. /정인한 시민기자

◇분만실

예상했던 것보다 산통을 오래 했다. 빨리 끝나길 바랐다. 산도는 열렸지만 시간은 틈이 없는 듯 천천히 흘렀다. 좁고 낯선 분만실에 너무 오래 있었다. 지친 그녀는 힘을 주지 못했다. 결국 간호사가 아내의 가슴 쪽에 앉았다. 불룩한 배를 눌렀다. 팔목이 도드라져 보여서 나는 눈을 감았다.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장막 뒤에 아내가 있었다. 무서웠다. 삶을 관통하는 아픔처럼 보였다. 내가 느낄 수 없는 고통을 표현하는 그녀의 소리를 듣자, 잠시 소유했었던 행복에 대해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부서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숨 막히는 공간 안에서 우리의 앞날은 상상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각은 과거로 거슬러 가는 느낌이었다. 청춘의 계절, 안정적인 어딘가에 닿고 싶었던 시절이 기억났다. 간절했으나, 세상의 문은 좁았고 나는 편입되지 못했었다. 짊어진 것이 없어 가벼웠지만, 되레 힘겨웠다. 그것은 흐릿한 이미지를 보이며 느리게 지나갔다. 그리고 아내를 처음 만난 짧은 순간이 선명해졌다. 그녀를 만나서 오랫동안 몰두했던 꿈도 접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내는 이 세상에서 내가 머물 수 있는 유일한 땅이었다. 어느 순간 기도를 하면서 해산을 기다렸다. 이 시간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불현듯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높고 날카로운 음이었다. 이어서 아내가 흐느끼는 소리도 들렸다. 엄마가 된 그녀가 "별아" 하고 태명을 부르니, 서우가 될 아가는 울음을 그쳤다. 탯줄은 끊어졌고 우리 삶에 딸이 들어왔다.

◇거실

새로운 세상이었다. 둘이 살아갈 때와는 모든 것이 달랐다. 부지런해야 했고 감정도 눌렀다. 아기의 몸짓은 완전한 선의를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고 있다면 모든 것은 젊은 부부의 불찰이었다. 암호 같은 몸짓을 해석하면서 그녀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딸을 챙기는 아내의 모습에 경외심이 들기도 했다.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씻겼다. 삶에 여유는 줄었다. 반복되는 일이 많았다. 시간은 지겹게 혹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렀다. 하지만 각오한 것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아기는 엄마의 품이면 오래지 않아 울음을 그쳤다. 원래 둘은 하나였고 여전히 한 몸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탯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금씩 자라면서 새로운 요구가 생겼다. 지루함을 표현하고 때때로 이유 없이 칭얼거렸다. 흑백의 모빌에 색이 돋아나고 아기의 목에 힘이 생기면서 그랬다. 서우가 오래 울면 천장이 점점 낮아지는 느낌이었다. 초조하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 나는 피로가 묻은 셔츠를 벗고 딸을 안았다. 그리고 함께 세상 구경을 했다.

대단한 유람은 아니었다. 거실로 나왔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빈 곳이 많았다. 그런데도 아기의 눈썹은 올라갔다. 뚱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주로 데코 스티커를 보여줬다. 이전에 살던 사람이 주방에 붙여놓은 것이었다. 고양이, 나비, 코끼리, 꽃, 발자국. 그것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하면서 손가락으로 짚었다. 때로는 어설픈 동화를 지어서 속삭였다. 겨우 그 정도의 아빠 노릇을 했지만 아기는 인형 같은 팔을 버둥거렸다. 그것이 칭찬 같아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떤 밤은 창문을 열었다. 비도 만지게 해주고 지나가는 차를 보여줬다. 추운 날은 거실 불을 껐다. 달이 떠 있었다.

▲ 무사히 태어난 서우. 서우는 그렇게 우리 삶에 들어왔다. /정인한 시민기자

◇카페

지나가는 빛 덕분에 시간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는 듯 딸의 눈동자는 반짝였다. 날이 갈수록 몸무게는 늘었고 세월은 그렇게 또 느껴졌다. 처음에는 육아의 고됨을 나누고자 의무감에 시작했었다. 언제부터 아빠다운 마음이 조금씩 생겼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녀는 언제나 딱 맞게 안겼다. 나의 준비됨과 무관하게 내 존재를 원했다. 그런 시간이 천천히 쌓여 딸은 나에게 얼마든지 무거워져도 견딜 수 있는 하중이 되고 있었다. 도리어 내가 의지하는 삶의 무게였다.

딸이 고맙다. 덕분에 나는 지면과 굳게 연결되는 기쁨을 느낀다. 때때로 엄습하는 고독과 불안도 그녀를 보면 잔잔해진다. 잡아준다. 나를 아늑한 솜이불처럼 덮어준다. 눌러져서 활자가 새겨지는 것처럼 생애 속에서 의미가 돋는다.

바리스타도 커피를 눌러준다. 추출하기 전 포터 필터의 분쇄 원두에 힘을 가해야 한다. 그래야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세차게 나오는 뜨거운 물을 견딘다. 압력을 온전히 받으면 물에 잘 녹지 않는 성분이 용해된다. 금빛의 크레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카페가 분주하다. 옆에서 함께 일하는 윤지가 필터에 담긴 볼록한 원두와 마음을 다진다. 손목이 도드라져 보인다. 그렇게 한 줌의 존재를 고스란히 관통한 물은 커피가 된다. 내려진 한잔이 사람들을 달뜨게 한다. 동시에 눌러앉는다. 그들은 진득하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삶의 무게도 나누어 가진다. 세상이 한결 살기에 좋아진 것 같다. 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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