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여의주, 빨간 데 놓아도 본디 청정
항상 자기 근본 마음 잃지 않고 살아야

봄 햇살이 고운 날이다. 화사하게 핀 붉은 홍매화꽃을 바라보면 문득 '뜰 앞의 잣나무'라는 공안이 생각난다. '이 뭣고'라든지 하는 화두를 종일토록 붙잡고 있노라면 똘똘 뭉친 기멸심이 끊어지고 고요함을 넘어서 적적(寂寂)해짐을 느낀다. 역시 참선이란 맑고 밝은 명경지수다. 그래서 옛 조사들은 한결같이 참선을 통해 기멸심(起滅心)이 끊어지고 생사를 벗어나 절대 죽지 않는다고 했다. 도인들은 목이 잘려나가도 마치 봄바람에 베는 것 같아 해칠 수 없다고 했다. 그건 바로 생사를 초월한 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무기공(無記空)을 뛰어넘는 신령스러운 '일찰나(一刹那)에 구백생멸(九百生滅)'이라고도 한다. 즉 찰나의 짧은 시간 동안에 구백 번이나 나고 죽는다고 하니 한 생각이 흐르는 것이 모두 나고 죽는 것인데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힘을 다해 화두를 잡아 스스로가 죽는 이치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혜능 스님은 "보리(깨달음)란 본시 나무가 아니다. 명경대 역시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때가 낄 곳이 어디 있는가"라고 했다. 본래 때 낄 곳이 없는데 자기 스스로 착각해서 스스로 더러움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 우리 중생의 삶이다. 모든 중생이 다 본래 부처인데 거기에 무슨 잠꼬대 같은 생사가 있고 그것에 걸림이 있겠는가?

가령 여의주라는 것은 아주 맑고 깨끗한데 이것을 검은 데 갖다 놓으면 검어지고 빨간 데 갖다 놓으면 빨개지고 누런 데 갖다 놓으면 누레진다. 어리석은 사람은 빨개졌다고 닦아 내고 누렇게 되었다고 닦아 내지만 천년을 닦아도 닦아지지 않는다. 영리한 사람은 그것을 들어내 빨간 것을 흰 곳에 옮겨 놓는데 결국은 그것도 미련한 짓이다. 검은 그대로 빨간 그대로 누런 그대로 청정하게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한 생각 깨치면 이 중생 속에 부처가 되는 것이다.

우리 자손들에게 돈을 넘겨주고 책을 넘겨주고 이론을 넘겨준다고 자손들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함부로 빼앗아 갈 수 없는 확고한 정신문화가 우리 국민에게 심어질 때 세계만방에 소리칠 수 있는 위대한 국가가 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성인이 나올 수 있다. 하루를 살아도 정신없이 사는 것이 우리 중생의 삶인데 그런 가운데에도 항상 자기의 근본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선(參禪)이다. 밖으로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안으로 자기 마음에 모든 산란심이 사라진 자리가 참선 자리이다. 거울에 초점을 맞추어 햇빛을 모아야 불이 일어나듯이 우리의 생각도 초점을 맞추어야 그 모르는 의심 덩어리를 뚫고 갈 힘이 생긴다. 오늘날 사회가 혼탁한 것은 모든 중생의 정신이 병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인과만 알아도 혼란은 오지 않는다. 우리의 모양은 형형색색으로 남녀구분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절대평등하다. 그 절대적인 자리에 무슨 차별상이 있겠는가. 이러한 것을 뛰어넘어서 절대 평등한 안목을 얻기 전에는 참선의 방법을 찾을 수 없음을 아는 것, 이것부터가 참선을 바르게 하는 기초임을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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