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문턱도 못가고 끙끙 앓는 날 많아
병원비 지원조건·절차 복잡
부모 신분공개 기피도 한몫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해야

미등록 이주아동은 부모와 마찬가지로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의료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출생등록을 하지못해 흔적 없이 살아가는 미등록 아동들이 겪는 어려움은 커지고 있다. 건강보험증이 없어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다.

보건복지부와 이주민지원단체 등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민은 '외국인 근로자 등 소외계층 의료서비스 지원'을 통해 병원비 등을 지원받을 수 있다. 입원부터 퇴원까지 발생한 총진료비의 90%를 정부가 지원하고, 10%는 본인이 부담한다. 회당 500만 원 범위 내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 지원 대상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배우자와 자녀까지 포함된다.

◇정부 지원,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 = 하지만 지원조건이 미등록 이주민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 사실상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 의료서비스를 신청하려면 여권이나 외국인등록증, 여행자증으로 신분을 확인한다. 2단계로 체류 기간이 90일 이상, 현재 앓는 질병이 국내에서 발병했다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또 노동 사실을 입증하는 3단계를 거쳐야 한다. 마지막 4단계에서 건강보험, 의료급여, 산재보험 적용 여부까지 확인되면 지원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과정에서 미등록 사실이 공공기관에 노출될 것을 우려해 신청 자체를 꺼리거나, 여권이나 외국인등록증을 사업주나 브로커에게 뺏긴 미등록 이주민은 1단계도 통과할 수 없다. 특히 노동자 신분을 입증하기 어려운 미등록 이주민의 특성상 3단계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현재 노동 사실을 입증하려면 해당 사업장의 업종, 사업장의 소재지, 근무기간, 사업장 소속임을 확인하는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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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미등록 이주민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은 사업주들이 근무 사실을 확인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지적했다. 사업주가 노동 사실을 확인해주지 않는 대신 병원비 일부를 건네는 일종의 '합의'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의료비 지원 신청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데 부모의 노동 사실이 확인되지 않으면 지원을 받기 어렵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등록 이주민들은 공적 지원보다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무료 진료소를 많이 찾는다. 신원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별도 비용도 들지 않아서다.

한국이주민건강협회가 미등록 이주아동의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으며, 국제 비영리기구인 세이브더칠드런도 직접 지원에 나서고 있다. 또 사회복지단체인 건강과나눔이 수도권 지역에서 미등록 이주아동과 이주노동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를 열고 있다. 경남지역에서는 경남이주민센터가 그 역할을 하고, 부산지역 지원단체 '이주민과 함께'가 협력병원을 통해 미등록 이주아동을 돕고 있다.

한 이주민 의료 지원단체는 "정부 의료지원은 매우 까다롭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다. 자연스럽게 미등록 이주아동 의료인권 보장은 시민사회단체들 몫이다"며 "부모의 사실 여부 등과 관계없이 모든 미등록 이주아동의 건강권이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난민아동도 인권 사각지대 = 지난해 국회에서 열린 '국내 난민아동 지원방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에서는 미등록 이주아동에 대한 의료지원과 학습권 보장이 중요한 이슈로 다뤄졌다. 국적이 없으면 법적 보호나 제도적 혜택에서 소외돼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 정부의 제도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국 거주 난민아동들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인종차별철폐위원회 등은 한국 정부에 이주민·난민·무국적 자녀를 포함해 대한민국에서 출생하는 모든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 출생등록을 도입해야 한다고 권고해왔다. 지속적으로 난민네트워크를 비롯한 시민단체는 보편적 출생등록제 도입을 요구하고 있으나 정부는 미온적이다.

지난해 세이브더칠드런이 낸 '난민아동지원 성과 평가 및 지원방안에 관한 연구'를 보면 난민아동들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도 병원을 이용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 49.2%가 '치료비에 대한 부담'을 꼽았다.

건강권은 생명권과 직결되는 권리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의 고유의 생명권과 도달 가능한 최상의 건강수준을 향유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더불어 협약 비준 국가가 아동건강 서비스 이용에 관한 권리가 박탈되지 않도록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 제도상 직장 가입자가 아닌 난민신청자나 인도적 체류자 자녀는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없다. 부모의 경제적 여건 등 이유로 병원비 부담으로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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