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마산야구협회 결성 '마산팀' 조직·육성 공들여
이경구 감독 주축 승승장구, 6·25 발발 후 급격히 위축

-마산팀 1948년 기세등등-

'마산 야구'는 1945년 8월 해방 이후 활기를 띠었다. 특히 마산야구협회가 1947년 4월 22일 결성되며 동력을 만들었다.

이 당시 마산에서 활동하는 팀은 최강 '남전(南電·한전)'을 비롯해 제일은행·진일철공·어업조합·JS(자산동) 등 10여 개에 이르렀다. 이에 마산야구협회는 '전마산 직장별 연식야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영은 동네야구팀 수준이었다. 한 선수가 남전에서 조금 뛰다 제일은행 요청을 받으면 또 한 달 정도 뛰어주는 식이었다.

이들 선수가 연합한, 즉 마산 대표 성격을 띤 것이 '마산군'이었다. 당시 '올(all·모든) 마산팀'이라 불리기도 했다. 제대로 된 이 지역 야구팀 시초로 볼 수 있다.

마산야구협회는 1948년 들어 마산군 육성에 정성을 쏟았다.

▲ 김성길 옹이 1950년 마산군팀 소속으로 '제1회 영남 3대 도시 대항 야구대회' 때 신었던 야구화(위 사진)와 유니폼은 현재 창원NC파크 야구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협회는 우선 1948년 4월 '제2회 전마산 직장별 연식 야구대회'를 후원하며 마산중학교에서 개최했다. 이후 5월 19일 부산 원정 친선 경기를 주선했는데, 마산팀이 부산팀을 3-1로 눌렀다.

5월 25일에는 서울 대표팀을 마산으로 초청했다. <마산시 체육사>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담았다. '서울팀과 마산팀 야구 시합은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빅게임이었기에 수많은 관중이 모여들었다.'

이 당시 서울팀은 각종 대회 전승 우승 등 최강을 자랑했다. 마산팀은 8회까지 2-3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9회 2사 후 극적인 안타로 3-3 동점을 만들었다. 연장전에서 이성기의 결승타로 거함 서울팀을 격침했다.

협회는 그해 7월 24~27일 마산중학교에서 '4대 도시 대항야구리그전'을 개최했다. 마산방송국이 중계할 정도로 지역민 관심도 컸다. 마산팀은 그 열기에 보답했다. 서울·부산·대구·마산팀이 리그전을 펼쳤다. 마산은 2승 1패를 기록하며 부산과 최종 결승전을 펼쳤다. 마산은 연장 12회 접전 끝에 부산을 1-0으로 누르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마산팀이 1948년 한 해 동안 거둔 성적은 34전 22승 1무 11패였다. 마산야구협회는 1948년 말에 마산팀 성적을 지역민에게 보고하는 별도 자리까지 마련했다. 이 당시 마산야구협회장은 김종신(1904~1978)이었다. 그는 이후 동양주류(유원산업) 사장, 마산시장,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다.

-이경구 사단의 화려한 면면-

옥종수 초대 마산체육회장은 여러 종목 가운데 축구와 더불어 야구 부흥에 신경 썼다. 이에 마산체육회는 서울에서 이경구 씨를 '마산군' 감독으로 데려왔다. 그는 휘문고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부터 전조선대표 외야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1946년 조선야구협회 초대 이사를 맡고 있었다. 마산군은 1946년 3월 구성된 후 그해 말 해체됐는데, 이경구 감독이 1947년 8월 선수들을 다시 모아 팀을 재건했다.

'이경구 사단'은 마산체육회·마산야구협회 기대에 부응하며 1948년 승승장구했다. 이 시기 마산군 선수단 주요 멤버는 투수 '이성기(주장)'를 비롯해 △포수 박재영 △1루수 김상대 △2루수 박상권 △3루수 이기역 △유격수 김계현 △좌익수 이종범·한경열 △중견수 김성길·배성수 △우익수 김준호·고창렬 등이었다.

당시 중견수로 활약했던 김성길(93) 옹은 당시 선수들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풀어놓았다.

"투수 이성기는 당시 나왔다 하면 무조건 완투였습니다. 6·25 터지고 나서 북으로 넘어가면서 더는 소식을 듣지 못했죠. 1루수를 봤던 김상대는 부산상고(현 개성고) 재학 당시 고교 선수로는 최초로 서울운동장에서 홈런을 쳤어요. 2루수 박상권은 수비를 기가 막히게 했어요. 역모션으로 잡아서 1루로 송구하는 모습은 정말 멋졌습니다."

이들 가운데 박상권·김계현·한경열·배성수는 1948년 '올코리아', 즉 지금의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당시 조선야구협회가 미국 하와이 교포연합회로부터 초청을 받고, 현지 경기를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조선야구협회는 연기를 거듭하다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당시 선수 비자 문제가 걸림돌이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국전쟁 직격탄-

마산팀은 1949년에도 위용을 떨쳤다.

마산은 6월 16~20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4회 월계기쟁탈 전국도시대항대회'에 출전했다. 마산은 준결승에서 인천을 8-7로 눌렀지만, 결승서 서울에 2-3으로 패했다.

마산야구협회는 8월 26~28일 마산중앙구장에서 '마산 4도시(서울·부산·대구·마산) 대항대회'를 개최했다. 서울이 3승으로 우승을, 마산은 2승 1패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마산은 11월 5~7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4도시(부산·대구·인천·마산) 대항 야구리그전'에서 종합 전적 2승 1패로 대회 우승을 낚았다.

고교야구도 이해부터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마산상업중(현 마산용마고)은 1947년 창단 이후 1949년 9월 7일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쌍룡기(현 화랑기) 쟁탈 전국고교대회'에 출전했다. 하지만 1회전에서 경남중(현 경남고)에 0-5로 완패하며 전국 무대 벽을 실감해야 했다. 이 당시 주요 선수는 이호헌(당시 이름 이정렬·24회), 문경수(26회), 허두(27회), 정수택(27회) 등이었다. 이호헌은 이 대회 선수 대표로 선서를 했다.

마산은 1950년에 들어서도 4월 15~17일 부산에서 열린 '영남 3대 도시(부산·대구·마산) 대항야구대회'에서 2승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마산은 5월 19~23일 서울운동장에서 7개 팀이 참가한 '제5회 월계기쟁탈 전국도시대항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탈락했다.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나면서 전체 체육계가 침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야구'는 특히 그랬다. 1952년 10월 4~6일 피난지 대전에서 '전국도시대항대회'가 2년 만에 재개됐다. 마산팀은 이전까지 줄곧 참가하다 이때는 이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때까지, 마산야구 관련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마산시체육사>는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마산 체육계는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해방 직후 전국 야구계를 주름잡던 마산야구팀 선수들 가운데 종전 이후에도 계속 활약한 인사로는 고창렬·서문두·김성길 등에 불과했고, 많은 사람은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한국 야구사 연표>, 홍순일 편저, KBO·대한야구협회, 2013 △<인천야구 한 세기>, 인천야구 백년사 편찬위원회, 2005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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