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그림 전하지만 실물 소실
〈조선기행록〉 1901년 사진 발견
1907년 사진에는 익루 사라져

고지도 그림과 글로만 존재했던 진주 촉석루에 딸린 누각들이 찍힌 옛 사진이 발굴됐다. 118년 전인 1901년에 찍은 사진인데 촉석루 익루(翼樓·부속 누각)를 사진으로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은 진주성 답사 후 관련 서적을 찾아보던 중 일본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조선기행록>(푸른길·2010년 11월 10일 발간)에서 촉석루 사진을 발견했다. <조선기행록>에 실린 진주 촉석루의 옛모습은 1901년 1월 말에서 2월 초 사이 찍은 것으로 함옥헌(涵玉軒)이라고 하는 익루가 선명하게 보인다.

박 연구원은 "촉석루가 현재 모습과 달리 부설 누각이 있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옛 촉석루 사진은 모두 익루가 보이지 않는다. 촉석루 익루를 사진으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며, 사진 찍은 시기가 명확해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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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기행록>에 실린 1901년 진주 촉석루 익루 사진. 촉석루 옆에 ㄱ자로 된 익루가 보이고 촉석문도 보인다. /박영주 경남대박물관 비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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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촉석루와 촉석문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진주성과 주변 경관을 재현한 조선 후기 지도인 '진주성도'(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를 보아도 촉석루 옆에 익루가 있었다. 하지만, 코베이 경매 사이트에 올라온 1907년에 찍은 촉석루 사진에는 익루 모습이 보이지 않아 1907년 이전 익루가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강진 동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계열 교수는 '진주 촉석루 제영시의 제재적 성격'이라는 논문(2008년)에서 "촉석루가 본루이고 좌우 속루라고 하는 익루가 있었는데 4개였다.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좌우 누각 4개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2개 누각(쌍청당·임경헌)은 복구하지 못하고 청심헌은 중수하였지만 몇 차례 화재가 나면서 1757년에 없어졌다. 동각인 능허당은 함옥헌으로 바꾸어 복구했지만 1906년 일본인에 의해 사라졌다"고 밝혔다.

조현근 경남시민문화네트워크 사무국장은 "이번에 찾은 촉석루 익루 사진은 진짜 대박이다. 헌종 10년(1844년) 밀양 영남루를 개창할 때 참고한 것이 바로 진주 촉석루인데 무엇을 참고했는지는 나온 것이 없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사진은 바로 1901년 초 사진이고, 영남루에 있는 익루가 촉석루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즉, 문헌에 있는 내용인 영남루가 촉석루를 참고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조 국장은 이어 "왜 촉석루가 밀양 영남루·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누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경치뿐만 아니라 누각의 웅장함과 위상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조 국장은 사진을 근거로 1960년 재건한 촉석루가 잘못 복원됐다는 문제도 지적했다. 조 국장은 "당시 촉석루 복원사업을 할 때 문화재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기둥이나 규모 면에서 원형을 살리지 못했다는 지적을 해왔었다. 이번 1901년 사진을 보면 촉석문도 보이는데 지금과 같이 잡상(장식기와의 하나)이나 취두(용마루 양끝에 댄 장식)는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의미 있는 자료를 찾은 만큼, 이후 촉석루를 유지·보수하는 과정에서는 원형을 유지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촉석루 사진이 실린 <조선기행록>은 일본인 지질학자가 100년 전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펼친 답사기다. 이 책은 1901년 1월 3일 군산에서 출발해 부산·김해·고성·마산·목포를 돌아 3월 19일 부산에 도착하기까지 69일간에 걸쳐 한반도 남부를 동서로 3번 횡단하면서 길거리를 근거로 한 지형과 지질, 암석학적 분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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