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된 여성의 몸을 재생하다
“일몰 무렵이던가/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가는 길/태양이 내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그후론 내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이다(‘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부분)”
이처럼 시인의 몸은 훼손되어 왔고 점점 폐허가 되어간다. “들어가야 할 곳과 빠져나와야 할 곳이/점점 같아지는 37세(‘빈집’)”에 “살과 뼈가 소리 없이 이별을 견뎠다는 생각(‘경첩에 관하여’)”이 불쑥불쑥 찾아온다. 그럴 때면 “은색 냄비의 손잡이처럼 얼굴 양쪽에 매달려 있을 뿐(‘귀’)”인 귀를 양쪽 손으로 부여잡고 “내 얼굴에 가득 찬 오물을 쏟아버리고(‘귀’)”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시집의 표지 색깔처럼 시집 전편에는 붉은 핏물이 곳곳에 배어 있다. “내 가랑이에 조그만/쇠사슬이 걸려있(‘새의 부족’)”어 “공포가 살을 뚫고 들어”오고, “대가리에 피갚 흐르는 동물들이 배회를 한다.
시인은 죽음의 직유법인 ‘무덤’순례를 감행한다. 시집의 2부는 ‘무덤 박물관에서’라는 연작시 23편이 수록돼 있다. 김해의 구산동 고분군과 대성동 고분박물관을 돌며 “아직도 숨쉬고 있는 육체의 죽음”을 발견한다. 육체는 죽었으되 아직도 숨쉬고 있다?
박서영 시인의 시는 온 몸의 감각을 이용해 읽어야 할 듯싶다. 살아 움직일 듯한 “글자의 근육(‘점자책’)”을 포착한다면, 죽음을 목도하면서도 몸 속에 따뜻함이 차 오르는 걸 느낄 것이다.
박서영 시인은 “이번 시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100여편의 시를 폐기하는 등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며 “첫 시집의 작품성을 뛰어넘기 힘들다고들 하는데, 어쨌든 창작에 열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박서영 시인은 1968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1995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천년의 시작. 136쪽. 6000원.
관련기사
관련기사
임채민 기자
lcm@domi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