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들판에 코스모스 꽃 천지 웬말
그래도 주식은 쌀…이대로면 밀 신세

하늘 높푸르고 들판 가득 코스모스 향기가 산들산들 코에 감긴다. 가을이 드니 방방곡곡 산과 들에서 꽃축제가 만발했다. 십수 년 사이 사철 가리지 않고 부쩍 늘어난 꽃 잔치가 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이면 더욱 성황을 이룬다. 온 들판에 봄이면 유채, 가을이면 코스모스 등을 심어 나들이객을 끌어 모은다. 오뉴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고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벼야 하는 들판이 꽃과 나들이객으로 온통 울긋불긋하다.

어린 시절 가을 들판을 떠올리면 말 그대로 온통 일렁이는 황금 물결이었다. 가을볕 좋은 날이면 가정실습이라 하여 일손 돕기 방학을 맞은 아이들까지 달려들어 벼를 베었다. 낫질이 서툴러 한 포기를 잡고 베는데도 뿌리째 뽑으면 어른들이 낫 쥔 손을 잡고 요령을 가르쳐 주었다. 솜씨 좋은 상일꾼은 열 포기까지 모다 쥐고는 단번에 베었는데 촤라락~ 하고 베어지는 낫질 소리가 참 경쾌했다. 벼를 베어 논바닥에다 낟알 털기 좋을 만큼 가을볕에 말렸다. 물이 나는 구릉논이거나 날씨가 좋지 않으면 논둑에 길게 세워 말렸다. 구불구불 끝없는 논둑으로 여우 꼬리처럼 풍성한 황금 벼 이삭이 한 결로 포개어선 모습은 북방 삭풍을 막아선 만리장성같이 든든했다. 들판이 반쯤 비어 갈 무렵이면 돌담 위로 사람은 보이지도 않게 커다란 볏짐이 이삭을 출렁거리며 골목으로 들어선다.

그 시절엔 타작을 논이나 마을 타작마당에서 하지 않고 집마당에서 했다. 한 톨이라도 버리지 않으려고 온 집안을 먼지 구덩이로 만들었다. 마당에는 경상도 말로 '두지'라 부르는 뒤주가 있었다. 대소쿠리 만들 듯 대발을 엮어 큰 독 모양으로 만들고 안쪽에 짚을 넣어 반죽한 황토를 발라 삿갓 모양의 작은 짚지붕을 얹었다. 이 두지는 보통 닷 섬이나 열 섬지기까지 있는데 논에서 이미 볏짚째 말린 터라 타작이 끝나는 대로 마을 말감고 영감을 불러 말질하는 소리를 하며 세어 붓는다. 검불까지 풍구질로 날려 한 톨의 낟알도 허투루하지 않았다. 쌀은 우리네 목숨과도 같이 소중한 존재였다. 쌀이 있어 우리네 들판과 거기 엎드려 사는 사람을 천하지대본이 되게 했다.

얼치기 농사꾼으로 고향에 눌러앉아 거창하게 책상머리에 '상업농 경영'이라 써 붙이고는 나름 부농의 꿈을 키우던 나는 고소득 작물을 찾아다니다가 제주도에서 당시 보기 힘든 과일을 보았다. 향기가 짙고 방울토마토 크기에 탱글탱글한 노란 금귤이었다. 고향은 제주보다 춥지만 비닐 한 겹 더 씌운다면 소비지인 대도시까지 유통이 수월하므로 경쟁에서 유리할 것 같았다. 논에다 비닐하우스를 짓고 금귤나무를 심었다. 명색 농업 관련 전공으로 학교를 다닌 녀석이 농사를 짓는다니 어떻게 하나 보던 어른들이 대경실색을 했다. "야 이놈아. 나락논에다 나무를 심어? 학교에서 뭐라 배웠는지 몰라도 나락을 못 심는 밭이나 산에다 심어야지. 이 무슨 벼락 맞을 짓이냐?" 대놓고 나무랐다. 수익이 벼농사보다 월등히 높다고 설명해도 그분들에겐 그깟 돈 몇 푼보다 쌀이 하늘이었다.

장에 쌀을 팔아 필요한 것을 사러 갈 때조차 쌀 팔러 간다고 하지 않았다. 돈 사러 간다거나 쌀 내러 간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버섯 재배가 앞으로 소득이 높으리라고 전망했다. 버섯 재배사를 짓느라 아버지와 여동생이 돈을 모아 장만한 서 마지기 논에 콘크리트를 들이부었다. 당연히 아버지는 노발대발이었다. 어떻게 장만한 논인데 천둥지기도 아닌 문전옥답을 버려 놓았으니 아들을 버린 자식 보듯 했다.

박보근.jpg

이렇게 젊은 농사꾼들이 벼농사로는 품삯도 건질 수 없어 특용작물이나 시설 재배로 전환하면서 나락논이 사라져갔다. 그런데도 쌀은 오히려 남아돌아 가격이 폭락하였다. 수입쌀의 영향도 있지만 식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쌀 소비가 줄어든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식량자급률은 쌀을 제외하고는 20% 수준인데 육류와 기타 곡물의 소비는 늘어났다. 정부는 농민들에게 남아도는 쌀농사 짓지 말고 다른 작물을 재배하면 직불금을 더 주겠다고 한다. 현재 과잉 생산되는 쌀도 줄이고 기타 곡물의 자급률도 올라갈 테니 얼핏 옳은 듯하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네 주식은 쌀이다. 이런 이유 저런 사정으로 나락논을 비워간다면 지금 자급률 1.2%인 밀 신세로 전락하지 않겠나. 코스모스는 논둑이나 길섶에서 피어야 어울린다. 들판 가득 핀 코스모스를 보면 한 늙은 농부가 떠오른다. 지키려다 지켜 주어야 할 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백남기 어르신이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