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이 보여준 변화
여성·성소수자·비주류 역할 확대

나는 미국의 영화제인 아카데미 시상식을 매년 챙겨본다. 물론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챙겨보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사회현실을 한발 앞서 영화에 담아내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영화라 하면 보통 주류 문화, 백인 남성 그리고 과도한 제국주의 정서를 들 수 있었다. 영화계는 끊임없이 사회를 대변하고 반영하는 영화를 제작해왔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비주류 문화의 영화가 상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아카데미도 변화의 물결을 타고 점점 더 그 공고하던 주류 문화의 카르텔을 깨부수는 역사가 쓰이고 있다.

올해, 당연하게도 할리우드에서 촉발된 '#미투' 운동이 시상식 전반에 회자했다. 시작은 사회자인 지미 키멀의 오프닝 발언이었다. 그는 "남자들이 너무나도 심각하게 말아먹은 탓에 여자들이 물고기와 데이트하기 시작한 해"라는 농담으로 올해 아카데미의 문을 열었다. 여기서 '물고기와 데이트하기 시작한'은 올해 작품상을 탄 <세이프 오브 워터>를 말하고 이 영화는 실로 오랜 아카데미의 공고한 보수적 관점을 깨부순 첫걸음이 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보통 우리가 아카데미 작품상에서 기대하는 안전한 주류의 정서가 없다. 반대로 영화는 '미국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정상성'이라는 허구를 대놓고 조롱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 편은 장애인 여성, 남미에서 잡혀 온 물고기 인간, 흑인 여성, 동성애자 남성이고 극단적인 괴물로 그려지는 악역은 바로 '미국인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다. 같은 관점은 올해 아카데미에서 역시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각본상을 가져간 <겟 아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룡점정은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수상소감이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후보에 오른 모든 여성을 기립시키고 그들의 연대를 선언했다. 이 수상소감은 교육적이기도 했는데, 맥도먼드 덕택에 수많은 시청자와 업계 사람들이 'Inclusion Rider(포함 조항)'가 배우의 계약서에 여성과 소수자를 촬영장에 일정 비율 이상 포함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알게 했다. 지난해 남우주연상 수상자 케이시 애플렉이 성범죄 논란 때문에 여우주연상 시상을 포기했고 그 역할을 조디 포스터와 제니퍼 로렌스가 맡게 된 것도 기억할 만하다.

LGBT의 자연스러운 가시화도 눈에 띈다. 올해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판타스틱 우먼>은 트랜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였고 주연배우 다니엘라 베가는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선 최초의 트랜스젠더 배우였다.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령 경쟁부문 수상자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색자 제임스 아이보리(89세이다), <코코>의 제작자 달라 K. 앤더슨과 공동 감독 아드리안 몰리나 역시 모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였다. 기혼자인 앤더슨과 몰리나는 모두 소감에서 자신의 배우자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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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영화제의 심사위원은 주로 50~60대의 백인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그들이 점차 생각을 바꾸고 있다. 비주류 영화들이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은 것은 이만큼 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영화계에서 촉발된 #미투 운동이 도화선이 되어 그 여파가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다. 이를 계기로 미투 운동이 일회성이 아닌 사회를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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