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표가 세상을 바꿀 거라 믿습니다"
고교때 시력 잃은 김창수 씨 장애인 인권·권리 알리고자
이동 불편함에도 투표소로"더불어 사는 사회 꿈꿔"
네팔서 귀화한 이주민 부부절대왕권 국가서 독재 경험
투표로 민주주의 가치 실현"공존·배려하는 삶 희망"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지역일꾼을 뽑는 지방선거는 일상적 삶과 직결된다. 풀뿌리 민주주의 꽃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투표율은 총선과 대선에 미치지 못한다. 여전히 "뽑을 사람이 없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과 투표권을 스스로 저버리는 이들이 많다. 특히 북미 정상회담과 러시아 월드컵 등 굵직한 이슈에 가려 지방선거는 더욱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선거일은 국민의 주권을 행사하는 날이다. 민주주의 주인인 유권자는 투표할 권리가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 표'의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긴 이들이 있다. 장애인과 이주민이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과 이방인 취급을 받는 이주민에게 선거에 참여하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8일 그들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사전투표를 했다. 이들 삶을 통해 선거 의미와 투표 참여의 중요성을 짚어봤다.

◇"꿈꾸는 세상 향한 걸음" = 칠흑 같은 어둠이 시야를 덮쳤다. 눈을 떠도 감아도 세상은 늘 한밤중이었다. 24시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새까만 정전 속에 꼼짝없이 갇혀 버렸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운동장에서 뛰어놀다 눈을 다친 이후 김창수(65·창원시 마산회원구 양덕동) 씨의 삶은 '절망' 그 자체였다. 눈앞에 꼭 뭔가가 떠다니는 것 같았고, 시야가 잔뜩 흐리고 침침해졌다. 망막이 안구에서 벗겨진 것이다. '망막 박리'로 두 눈의 시력이 급격하게 저하되더니 결국 실명에 이르렀다.

지난 8일 시각장애인 김창수 씨가 사전투표소 사무원의 도움을 받아 투표를 하고 있다./문정민 기자

스무 살 부푼 꿈을 그리던 청년의 인생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밥 먹고 옷 입고 화장실 가는 것 어느 하나 혼자 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일상 속 사소하고 평범한 일들이 그에겐 빛이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홀로 헤매는 느낌이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게 도전이었고 낙담의 연속이었으며 좌절은 반복됐다.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그를 움직였다. 안마와 침을 놓는 방법을 익히며 시각장애인의 삶으로 녹아들었다.

생존을 위한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그에게 '정치'와 '나랏일'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선거는 '남의 일'인 듯했다. 대통령, 국회의원, 시장·군수, 시·군의원으로 누가 뽑히는 것보다 안마를 하고 침을 놓을 대상자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했다.

무엇보다 집을 나서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낯선 장소로 향하는 두려움이 그를 가로막았다.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곳을 맴돌기 일쑤였고, 발을 잘못 내딛는 바람에 하천 아래로 굴러 떨어진 적도 있다. 투표장으로 가는 과정은 김 씨에게 하나의 거대한 모험이었다.

그는 가정을 꾸린 뒤 생애 처음 투표장으로 향했다. 1998년 열린 서울장애인올림픽이 계기였다. 국내에서 세계적인 장애인 스포츠 축제가 개최되는 만큼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김 씨는 새삼 '장애인'으로서 삶을 스스로 돌아봤다. 단지 신체적으로 '다르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음에도 느꼈던 뜨거운 시선을. 김 씨는 장애인도 엄연한 사회 구성원이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인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백 번 입으로 말해봤자 나서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 현실이 그를 투표장으로 이끌었다. 대선, 총선, 지방선거 때마다 아내의 손에 몸을 맡겼다.

김 씨는 점자형 또는 음성변화 바코드로 된 선거 공보물을 통해 후보자 공약과 정책을 살핀다. 하지만 제도적 한계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선거 관련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투표장으로 가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막상 투표장에 도착해서는 시각장애인용 투표보조용구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혼란을 겪기도 한다.

장애인에게 국민의 당연한 권리인 참정권과 투표권을 '당연하게' 누리기란 꿈같은 이야기다. 그럼에도, 김 씨는 꿈을 꾼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그들도 당당하게 사회의 중심에 서는 그날을. 지난 8일 김 씨는 보다 나은 세상을 꿈이 아닌 현실로 만들기 위한 걸음을 옮겼다. 사전 투표장으로 가는 길은 더뎠지만 그렇게 세상도 천천히 바뀔 것이라는 믿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이방인 아닌 국민의 한 사람" = 가난한 나라에서 온 외국인 청년은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 땅을 밟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996년 산업연수생으로 충남 금산에 있는 비닐 생산 공장에 들어갔다. 선진 기술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낯선 타국살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는 곧 사그라졌다.

크고 짙은 눈동자가 돋보이는 수베디 여거라즈(48·김해시 대성동) 씨는 당시 느꼈던 실망감을 드러냈다. 공장에서 그는 한국노동자도 피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맡아서 처리했다. 노동은 고됐고 환경은 열악했다.

네팔 출신의 수베디, 아르얄 부부도 같은 날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문정민 기자

2년 계약기간이 끝나고 수베디 씨는 그가 태어난 네팔로 돌아갔다. 그리고 1999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번엔 신학생 신분이었다.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서 삶은 불안했고 힘들었지만 대신 또 다른 희망을 얻었다. 부당한 현실을 지적하고 목소리를 내면, 곳곳에서 이를 바꾸고자 하는 크고 작은 변화의 움직임이 보였다.

수베디 씨가 대학에 다녔던 1990년 당시 네팔은 절대왕정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권력은 국민이 아닌 왕에게서 나왔다.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정치·체제 개혁 요구와 내전으로 국가는 극심하게 혼란스러웠다. 국민은 독재정치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도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투쟁했다.

수베디 씨는 네팔에서는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이 한국에는 열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는다. 2009년 한국 국적을 취득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네팔에서 수베디 씨를 만나 한국으로 온 아내 아르얄 언저나(42) 씨는 2012년 귀화했다. 수베디 씨는 현재 김해 이주민의 집을 운영하며 이주노동자를 돕는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네팔에서 살았던 부부에게 선거는 진정한 축제이자 축복이다. 선거가 왜 민주주의 꽃인지도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실감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처음 선거에 참여했을 때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공정하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지지한 후보자가 당선됐을 땐 희열을 맛봤다.

국민 위에 군림하던 권력기관으로부터 고통받았던 이들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하고 정치인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지역사회나 국가를 운영할 인물을 제 손으로 뽑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에 빠짐없이 참여해 시민으로서 권리를 다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느낄 때가 있다. 역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다. 얼굴이나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당하는 차별과 편견이다.

선거 기간에도 예외는 없다. '유권자 패싱'을 당한다. 그도 엄연한 투표권을 가진 시민이지만, 후보자는 한국사람의 외모를 지닌 이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자신을 홍보한다. 단순히 보이는 걸로 판단해 '이방인'으로 취급하고 관심을 거둔다.

부부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를 그린다. 공존, 배려, 존중, 평등이 녹아 있는 삶은 한국인으로서 바라는 미래상이다.

지난 8일 사전 투표를 통해 성별, 장애, 나이, 학력 차이로 소수를 배제하지 않는 염원을 한 표에 담았다. 투표장을 나서며 입구에서 인증 샷을 찍는 그들에게 낯선 이방인의 모습은 없다. 오직 국민의 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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