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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자유가 뒤섞인 그 공간

[괴테루트 따라 떠나다] (9) 고독이 내려앉은 자리
이탈리아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 있는 '파도바'
산타 주스티나 성당에 순교자들 유해 안치돼 사제들의 고독 느껴져
인근 원형광장 조각상, 자유로운 분위기 물씬

2018년 06월 19일(화)
시민기자 조문환 webmaster@idomin.com

절제되고 엄격한 분위기의 비첸차, 아마도 이는 그 도시의 영웅과도 같은 팔라디오가 남긴 업적일지도 모르나 나의 여정은 점점 동쪽으로 향해 가고 있다. 그러하여 도시의 분위기는 절제에서 자유로 진행하고 있다. 비첸차에서 파도바(Padova)까지는 커피 한 잔 정도의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높은 산에 올라서면 서쪽으로는 비첸차가 보이고 동쪽으로는 베네치아도 손에 잡을 수 있을 만큼이다.

나에게 파도바가 자유로운 도시로 각인된 이유는 파도바 대학이나 이 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했다는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 의학자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르와 같은 존재 때문인지 모른다. 파도바 대학은 공식적으로는 1222년에 설립되어 볼로냐 대학 다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오래됐다고 하나 이 학교가 문서상으로 대학교로 기록된 것을 기준으로 했으니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 평판에도 괴테가 이 대학을 방문하고서는 낙망은 아닐지라도 실망을 금치 못했으니 이 학교 해부학 실험실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파도바 천문대.

나는 이 학교의 해부학 실험실과 박제된 동물들과 조류들을 전시해 놓은 공간을 오랫동안 흥미롭게 돌아보았다. 몇몇 학생들과 교수들도 만나 보았지만 괴테가 느꼈던 그 치욕적인 환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학교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찾아보지 못했으니 나로서는 다행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극과 극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인 것. 이토록 자유의 상징인 대학을 옆에 두고서도 고독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여행은 나그네로 나서는 행위이기도 하다. 인생이라는 큰길에서 자청하여 나그넷길을 나서는 것은 나그네 인생을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한 자발적인 행위다. 괴테도 자신을 나그네로 표현하곤 했는데 이탈리아로 떠나오기 10년 전, 그러니까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무에 종사하기 시작했던 바로 그해 그는 <나그네의 저녁 노래>라는 시를 지었다. 그로부터 4년 후에도 같은 제목의 시를 지었는데 그의 마지막 생일이었던 1831년 8월 28일 어느 작은 산장의 벽에 걸어 놓은 그 시를 읽으며 눈물지었다는 일화도 있다.

<나그네의 저녁 노래> 하늘로부터 온 그대/ 모든 괴로움과 고통을 달래 주고 / 갑절의 원기로 채워 주는구나 / 아, 나는 떠도는 데 지쳤다 / 이 모든 고통과 기쁨은 무엇이란 말인가? / 감미로운 평화여 / 오라, 아, 오라 내 가슴속으로!

산타 주스티나 성당 한편 예배실의 높은 좌대 위에는 신약성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던 누가의 무덤(관)이 안치되어 있었으며, 가롯 유다의 배반으로 12사도에 든 맛디아의 관도 그 반대편 예배소에 안치되어 있었다. 마침 수요일이라 미사가 드려지고 있었는데 불과 10여 명의 노인만 참여하였다. 1부 미사는 젊은 사제가 인도하는 일반인 중심의 미사였으나 2부 미사는 연로한 사제들도 무거운 육체를 이끌고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사제들을 위한 미사로 보였다.

미사 도중에 성당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가끔 들어오고 찬양 소리는 거룩하게 공명하여 첨탑이 솟은 높은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해 그 울림이 끊이지 않았다. 미사 찬송은 높낮이가 크지 않아 거의 일정한 음계에서 진행되어 떨림이 덜함에도 오히려 그 잔잔함 속에서 느끼는 여운은 더 오래갔다.

12제자에 들지는 않았지만 교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제자로 남아 있는 누가의 관을 앞에 두고 드려지는 것 때문인지 미사는 더욱 엄숙했다. 의사인 그는 업을 내려놓고 바울과 함께 복음의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바울의 순교 때에도 누가가 지키고 있었을 것으로, 그는 바울의 전도 여행에 목숨을 건 동반자였다. 대미사실과 또 다른 미사실이 있음에도 하필이면 누가의 관을 앞에 두고 미사를 드리는 이유는 그가 교회사에 남긴 의미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리라.

산타 주스티나 성당의 누가의 무덤.

사제들만의 미사에 참여한 숫자는 많아야 스무 명 정도였다. 고개를 숙인 사제들, 눈을 감은 사제들, 미사는 시종 엄숙하고 경건하였으며 소리는 천장에서 떨렸다. 순례객들이 육중한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에는 바깥에서 엄습해 오는 빛이 사람을 따라 들어오다가도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는 어둠이 성당 안을 다시 지배했다. 단지 찬양 소리에 따라 촛불만 떨릴 뿐이었다.

순례객들은 오로지 문 하나만 통과했을 뿐인데 고독의 관문을 통과한 것처럼 보였다. 저 사제들은 영원히 고독이라는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들, 마치 고독의 선악과라는 원죄의 열매를 따 먹은 죄인처럼 고독으로 물들여진 검은 사제복을 둘러쓰고 있었다.

괴테도 산타 주스티나 성당 구석에 홀로 앉아 사제들이 느끼는 고독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아무도 그가 이런 무거운 공간 속에 그 시간 그렇게 웅크리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화려한 출정식은 없었을지라도 적어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무를 담당했던 이로서, 당대에 이름난 작가 괴테가 이런 고독한 자리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로네'에서는 그는 존재감도 없었을 것이다. 그 맨 앞쪽에는 1466년에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목마(木馬)가 높은 거치대 위에서 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것처럼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찌나 공간이 컸던지 실제 말의 10배 정도 크기의 목마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내가 안 것은 발걸음으로 방의 길이를 재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였다.

산타 주스티나 앞의 프라토 델라 발레(Prato della Valle)로 불리는 광장 또한 성당의 크기나 명성에 걸맞게 무한정 넓었다. 이날 9월 중순의 따끈한 태양 아래 소풍 나온 학생들과 연애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 저녁 석양처럼 인생의 황혼을 맞이한 노인들이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프라토 델라 발레 광장.

원형으로 만들어진 광장의 가장자리에는 수로(水路)가 조성되어 있고 수로를 따라 안팎의 이중으로 조각상들이 적어도 수십 개는 세워져 있었다. 이 지역 출신이거나 이 도시에서 공부를 하고 나름대로 업적이 있다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또한 이 도시의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일 수 있다. 이 조각상 중에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있다고 하나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이 닳아 찾을 수 없었다.

이 고독한 군상들 아래 어떤 무리는 낄낄거리는 잡담으로, 어떤 이들은 절제 없는 애정 표현으로, 또 어떤 이들은 군상을 닮아 짓눌린 무게감으로 각양각색의 표정들이 해 질 녘 오래된 건물에 부딪혀 부서진 빛들에 섞여 광장에 나뒹굴고 있다. /시민기자 조문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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