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섬에서 조선업 메카로] (4) 고향이 된 섬

태초에 하나였건만 물길이 나누어 발걸음 멎게 하니 섬이다. 난바다에 홀로 나앉은 외톨이가 아니라 올망졸망 새끼 섬들을 끼고 바람막이로 자리 잡았다. 견내량은 손나팔로 뻐꾸기 소리를 내면 물동이 이고 가는 건넛마을 큰아기가 뒤돌아본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뭍과 가깝다.

맞은편이 다 보이는 좁은 여울목이라 견내량(見乃梁)이다.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보다도 폭이 더 좁지만, 바다 물길은 강물보다 그 흐름이 빠르고 거칠면서 사납다. 그 점을 이용한 이순신 장군은 견내량에서 제해권을 장악했고 명량에서 12척 신화로 재기했으며 노량에서 죽음으로 전쟁을 끝냈다.

바다가 빠르게 냇물처럼 흐른다 해서 갯내라 부르고 한자를 빌려 견내량(見乃梁)이라 쓴다는 설도 있다. 험한 물길로 품 안에 든 섬이지만 절해고도나 다름없었다. 가깝고도 머나먼 섬은 변방에 안팎 도적이 들끓는다는 이유로 보호는커녕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비우고 버려졌다. 서울 천 리 밖 섬은 정적을 제거하여 내치는 유형지가 되어 생사를 가늠할 수도 없는 땅이었다. 강대국 대리전쟁에 앞세워진 젊은이들은 물이 둘러친 울타리에 갇혀 저들의 이념 전쟁에까지 휘말려 서로 피를 부른 상처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물지 않았다.

1971년 거제대교 개통으로 길이 이어졌다. 다리밟기에 몰린 인파. /거제시 영상기록관
1971년 거제대교 개통으로 길이 이어졌다. 다리밟기에 몰린 인파. /거제시 영상기록관

◇조선 도시의 시작 = 사나운 물길에 막혀 비워지고 버려져 상처받았던 변방 경계의 섬으로 뭍에서 멈춘 발걸음이 견내량을 건넜다. 통영과 거제를 잇는 거제대교가 1965년 공사를 시작하여 1971년 4월 8일 개통하였다. 다리는 이름 그대로 크게 건너(巨濟) 이은 길로 섬을 뭍과 다름없게 만들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꼼짝없이 묶였던 섬사람들 바깥나들이가 풀리고 천혜 비경을 보려는 바깥사람들 드나들기가 수월해졌다. 그것에 더하여 다리는 섬을 세상 눈길 모이는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1970년 현대 정주영 회장은 울산 미포만 어촌 모래사장 사진 한 장과 오백 원짜리 지폐를 들고 쫓아다니며 조선 산업에 뛰어들었다. 2년 뒤 현대중공업(당시 현대조선)을 창립하여 조선소를 지으며 2년 3개월 만에 유조선 두 척을 건조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조선업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자 정부와 기업들의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부산 영도에 있는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인수한 극동해운 남궁련 사장도 조선소를 확장하려 했으나 이미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어려워지자 새로운 터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정부도 남궁련에게 현대조선에 버금갈만한 조선소 건설을 부탁한다. 그러나 초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마땅한 적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우선 수심이 충분하게 깊고 조수 간만의 차가 작아야 완성된 선박의 진수가 쉽다. 수백만 ㎡의 배후 터와 넓은 공유수면은 대형 자재 적치와 접안, 운송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었다. 거기다 대형 크레인 사용이나 안벽 작업에 지장을 주는 바람이나 파도를 막아줄 지형적 조건도 맞아야 했다. 남해안을 이 잡듯 훑고 다니던 남궁 사장이 거제 섬도 구석구석 살피고 다녔다. 신현읍 장평리 일대는 이미 고려조선이 선점하고 있었으며 일운면 지세포는 공유수면과 배후 터가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아양리 당등산 옥포정에서 내려다본 옥포만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적지였다. 맞은편으로 느태 뒷산과 파랑포가 양쪽에서 감싸 안아 깊고 너른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옥녀봉과 국사봉으로 이어진 해발 400~500m의 능선이 바람막이로 둘러섰으며 당등산 좌우 아주리와 아양리의 제법 너른 들이 펼쳐져 있었다.

조선소의 아침. /박보근
조선소의 아침. /박보근

◇순탄치 않았던 지난 세월 = 1973년 10월 11일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 기공식을 하고 1976년 준공을 목표로 공사를 시작했지만, 상황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현대는 조선소를 지으면서 배를 건조했다지만 이곳은 기반 공사부터 녹록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차 석유파동이 터졌다. 외자 도입이 어려워져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 프로젝트를 버릴 수 없었던 정부는 자금력과 경영력을 갖춘 새 사업주 찾기에 나섰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며 한창 사세를 확장하여 나가던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정부의 제안에 이를 승계 인수하여 1978년 9월 26일 대우조선공업주식회사로 재출발한다. 대한조선공사가 첫 삽을 뜬 지 5년이 지났지만 30%밖에 진척되지 못한 공사를 3년 만인 1981년 완공해서 한적한 어촌이었던 아주, 아양을 세계 조선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곳으로 바꾸었다. 승승장구하던 대우조선은 외환위기 와중에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워크아웃 고난을 겪는다. 이후 20년 넘게 주인 없는 회사로 떠돌다 한화그룹이 인수하여 한화오션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른다.

거제 대우조선해양은 2023년 5월 한화오션으로 새출발했다. /박보근
거제 대우조선해양은 2023년 5월 한화오션으로 새출발했다. /박보근

◇조선업 메카의 탄생 = 거제에도 비행장이 있었다. 현재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있는 지명이 장평(長坪)인데 한자 그대로 긴 들판이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포로수용소를 위한 군사용 경비행장이 있었다. 그런 만큼 넓은 배후 터가 있고 앵산과 계룡산이 바람막이가 되어 여기도 이미 정부에서 지정한 죽도국가산업단지로 1974년 고려조선이 일명 죽도조선소를 설립했다. 역시 이곳도 석유파동 여파로 진척이 늦어지다 우진조선이 이어받았으나 77년까지 공정 50%를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삼성도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따라 현 통영시 안정공단 지역에 조선소를 건립하려 했으나 석유파동으로 조선 사업을 뒤로 미루고 창원에서 기계 쪽으로 힘을 쏟는다. 우진조선은 고려조선주식회사를 이어받아 10만t 급 독을 건설해 연간 10만 t급 선박 4척 정도 건조하는 중형 조선소로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우진조선 역시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을 형편이 되어 더는 공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책으로 기업들을 몰고 가던 정부는 조선소 건설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탄탄한 기업으로 삼성을 지목했다. 그러나 중공업 분야에선 이미 기계 산업으로 눈을 돌린 삼성 입장으론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삼성은 1977년 4월, 공사 예상소요자금 185억 원 중 90억 원을 투입하여 전체 공정 50% 미만인 우진조선을 인수하여 조선업에 전격 뛰어들게 된다. 이후 대성중공업과 통합하여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로 태어났다. 한국조선해양, 한화오션과 함께 세계 3대 조선소에 이름 올리며 거제가 조선업 메카로 떠오르는 한쪽 날개가 되었다.

거제 삼성중공업 전경. /박보근
거제 삼성중공업 전경. /박보근

◇도심을 가득 메운 조선소 근무복 물결 = 세계 최대 조선그룹 한국조선해양이 있는 울산을 두고 거제를 조선업 메카라 말한 데는 그 이유가 있다. 대우와 삼성 양사가 조선소를 완공하고 본격 가동에 들어간 1980년 초반 이후 거제에서 사람을 만나면 첫인사로 대우 다니는지 삼성 다니는지를 물을 정도였다. 견내량을 건너는 다리가 뭍으로 길을 잇기 전인 1970년 거제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조선소 경기가 한창 좋을 2015년에는 25만 명이 넘었다. 그 대부분이 조선업에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거제는 울산처럼 자동차나 석유화학 등 조선업과 비견될만한 다른 업종이 없기에 출근과 퇴근 시간 길거리를 메우는 사람들 입성은 모두 양대 조선소 근무복으로 물결을 이룬다. 조선소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만 근무복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근무복이 일상 외출복이다. 회식하는 술집에서도, 2차 나간 노래주점에서도 똑같은 대우나 삼성 근무복이었다. 심지어 결혼식장이나 돌잔치, 집들이에도 근무복을 입고 나타난다. 장례식장에서도 퇴근 무렵이면 안전화까지 신은 채 떼로 들이닥친다. 왜 근무복을 회사 바깥에서 일상복으로 입고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필자에게 한 조선소 퇴역노동자는 자긍심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소 노가다니 공돌이, 공순이 혹은 땜장이로 불리며 멸시받던 시절이 있었다. 1987년 6.10항쟁과 노동자 대투쟁기를 겪으면서 달라진 시선과 나라 경제의 주역이라는 자긍심이 생겼고 양대 조선소를 안채와 사랑채로 둔 거대한 저택으로 느끼는 사람들에게 거제도는 내 집안이었고 부딪히는 이들은 모두 한솥밥 먹는 식구였다. 충청남도 천안 출신인 그는 조선소를 지을 때 건설 인부로 왔다가 기술교육원에서 훈련을 받고 평생 용접 노동자로 일했다. 퇴직 후 거제 둔덕면 산골 마을에서 작은 농장을 운영하는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물었다. 조선소를 밥벌이로 50년을 지낸 여기가 고향이라는 답을 들었다. 퇴직한 조선소 노동자들 열에 일고여덟은 떠나지 않고 거제에 눌러앉았다. 트랙터를 몰고 밭을 가는 그가 입은 옷도 조선소 작업복이다. 오로지 조선업 하나로 일구어 성장하고 그들의 둥지가 되고 고향으로 남았으니 거제는 조선업 메카가 맞다.

  /박보근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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